先週の金曜日、私たちはアブラハムが亡くなった妻サラの墓地を準備する過程を黙想しました。そこには、住んでいたヘブロンのヒッタイト人たちとの間で深く礼儀を尽くしてサラの墓地を購入する様子が詳しく記されていました。アブラハムは、神様が自分に与えてくださった約束の土地だからといって、それを強引に手に入れようとはしませんでした。長くその地に住んでいた人々に対して礼を尽くし、土地の代金も十分に支払う姿勢で墓地の購入を願い出ました。するとその地の人々は、無料で安心して墓地を使うようにと好意を示しました。それにもかかわらず、アブラハムはヘブロンの人々が見守る中で銀400シェケルを支払い、サラの墓地を正式に購入し、自分の所有として神の約束を実現しました。
 この者はアブラハム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主の召しを受けて日本の川崎に来た者として、どれほど町の隣人に対して礼儀を尽くし交わりを持ってきたのかと自分に問い直すと、大きな恥ずかしさを覚えました。一生懸命に生きてきたつもりではありましたが、隣人に対して果たすべき礼があまりにも足りなかったことを認めざるを得ませんでした。
 そこで、「救い主イエス様を必要としている現実の隣人とは誰だろうか」と考えてみました。それは特定の誰かではなく、今私たちの周りで実際に苦しんでいるすべての人が、私たちが出会うべき隣人であると思います。イエス様は、貧しい人、病んでいる人、疎外された人々と共におられ、彼らを見捨て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現代においても、経済的に困難な状況にある人々や移住者のような社会的に弱い立場にある人は、依然として助けを必要としています。また、外見は問題がないように見えても、内面の傷や孤独に苦しんでいる人、失敗や喪失によって打ちひしがれている人も多くいるでしょう。さらに、人生の意味を見失ってさまよっている人や、中毒や誤った選択によって自分を見失ってしまった人々もまた、回復を必要とする私たちの隣人です。彼らに必要なのは単なる解決策ではなく、共感と理解、再び立ち上が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希望です。そして重要なのは、彼らが遠くにいる特別な存在ではなく、私たちのすぐそばで生きている隣人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は彼らに関心を持ち、近づいていきたいものです。
 最近、教会の信徒たちがVIP、隣人を連れて来る機会が少なくなっていることを、気がかりに思っています。信徒同士の交わりの楽しさに目が向きすぎてしまい、隣人の魂の救いという教会の存在目的を見失いつつあるように感じるからです。どうぞ、心の貧しい隣人に対して礼儀を尽くし、声をかけ、もてなしてみてください。

趙 南洙師



 지난 주 금요일 매일성경을 통해,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묘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거주하던 헤브론 지역의 헷 족속 사람들에게 큰 절을 하며 예절을 갖추어 사라의 묘지를 구입하는 과정을 길게 설명하는 창세기23장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정해 주셨다면서 강제적으로 그 땅을 차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살고 있었던 지역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었으며 땅 값도 넉넉히 계산해 주면서 묘지 구입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지역의 사람들은 그냥 편안하게 묘지 자리를 사용해도 된다면서 호의를 베풀어 줍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헤브론 지역 사람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은 400세겔의 토지 값을 지불하고 사라의 묘지를 구입하여 자기의 소유로 삼아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었습니다.
 제가 아브라함은 아닙니다만,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가지고 일본 가와사키에서 이웃들에게 얼마나 예의를 갖추며 교제를 해 왔는가 되물으며 생각해보니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긴 했으나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나의 예의가 너무 부족하였음을 고백하지 아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구원자 예수님이 필요한 현실적인 이웃은 누구일까? “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특정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사람이 우리가 만나야 할 이웃이라고 생각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경제적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 이주민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여전히 도움이 필요합니다. 또한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내면의 상처와 외로움으로 힘들어하는 이들, 실패와 상실로 무너진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 혹은 중독이나 잘못된 선택으로 스스로를 잃어버린 사람들 역시 회복이 필요한 우리의 이웃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해결책이 아니라 공감과 이해, 그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들이 멀리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살아가는 이웃이라는 사실이며,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성도들이 VIP 이웃을 데리고 오지 않아서 저의 마음이 많이 무겁습니다. 성도간의 교제의 즐거움에 빠져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의 존재 목적을 잃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웃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말을 건네시고 대접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조남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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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리고 젊은 시절, 다니던 학교에서는 선생님을 통하여 이미 검정된 지식들을 커리큘럼에 따라 먼저 배운 뒤에 그 성과를 증명해 보는 학기말 시험을 나중에 치르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실전에서는 가혹할 정도로 그 전후를 뒤 바꿔 놓는 경우가 자주 일어 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예습도 하지 못한 채, 인생의 거친 파도 속에 내 던져지기도 하고 그 위기의 한복판에서 생존하는 법을 온 몸으로 체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거친 삶의 현장은 곧 배우지도 않은 것을 테스트하는 시험장이 되며, 우리 앞에 놓인 인생이라는 시험지 위에는 오답이란 존재 하지 않습니다. 거기엔 오직 ‘아직 배우지 못한 지혜들’ 만 존재 할 뿐 입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수 많은 순간들과 예상치 못한 좌절들은, 보이지 않던 내면의 힘을 길러내어 주는 가장 치열한 과외 수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고통스러운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며 얻은 수 많은 상처들은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는 통찰의 눈으로 바꿔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스런 인생의 시험을 마주 할 때 마다 고민하면서 찾아야 것은 결코 완벽한 정답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이라는 시험 앞에서 배움을 찾겠다는 유연한 태도가 더욱 필요할 것입니다.
 자신은 아직 준비가 덜 된 인생이라는 불안감에 발을 멈추기 보다, 부딪치고 깨지는 과정 자체를 피해 다니기 보다, 시련의 시험이 자신을 더욱 성숙하게 하며 성장하게 하는 필연적인 경로라고 인정하며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자주 닥쳐 오는 시련이라는 도전들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삶을 성숙으로 이끌어 주는 지혜의 성찬으로 여길 때,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어느 날인가, 시련의 고통을 넘어선 배움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고백을 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후4:8-10).”

조남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