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이 무신론자가 된 이유들 중의 마지막 설명에, 종교는 인간의 두려움(fear) 이라는 감정을 이용한다고 비판하며 기독교가 인류의 진보를 방해한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러셀의 논리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라는 성경의 경외(fear)란 말을 두려움, 공포로 이해한 오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러셀은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은 이런 두려움, 공포라는 자기 감정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만큼은 공포에 맞서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자서전을 보면 그가 이 ‘공포’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죽음 앞에 선 자로서의 두려움이 그의 자서전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무신론자 니체가 자신이 그렇게도 비판하고 있는 기독교가 진실로 진리라면 자신은 어떻게 하나 두려워하였던 것과도 같습니다.
허무의 공포, 죄의 심판에 대한 공포, 이런 공포들 때문에 크리스천이 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에 풍성하셔서 연약한 인생들이 여러 가지 공포들로부터의 피난처가 되시기도 합니다.
신약성경 디모데후서 1장 7절에“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러셀은‘두려워하는 마음’을 모든 종교의 기초라고 본 셈입니다. 그것은 편견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스스로 질문해보길 원합니다. 위대한 철학자라도 하나님 사랑을 볼 수 없다면, 크리스천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게 됩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인 것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사랑 때문입니다.